문선명

문선명
文鮮明
Moon Sun Myung

본명 문용명(文龍明)
출생 음력 1920년 1월 6일 (양력 2월 25일)
일제 강점기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
사망 음력 2012년 7월 17일 (양력 9월 3일) (92세)
우편번호(12461) 대한민국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미사리로 267-177 청심국제병원
사인 감기와 폐렴으로 인한 합병증
매장지 대한민국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송산리 천성산
국적 대한민국
학력 와세다대학 부설 고등공업학교 전기공학과
활동 기간 1954년 5월 1일 ~ 2012년 9월 3일
교파 통일교(현 신한국가정연합)
수행 성직 통일교(현 신한국가정연합) 총재
칭호 메시아, 만왕의 왕, 참아버님
칭호 기간 1960년 4월 11일 ~
직업 종교기관단체인
후임자 한학자 총재
배우자 한학자
자녀 문예진, 문효진, 문혜진, 문인진, 문흥진, 문은진, 문현진, 문국진, 문권진, 문선진, 문영진, 문형진, 문연진, 문정진
웹사이트 가정연합 홈페이지, Peace TV

문선명(文鮮明, 음력 1920년 1월 6일 (양력 2월 25일) ~ 음력 2012년 7월 17일 (양력 9월 3일)) 총재는 통일교 (현 신한국가정연합)의 창시자이다.

생애

출생 및 집안 배경

문선명 총재는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에서 남평 문씨 집안에서 문용명이라는 이름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6남 7녀 중 2남으로 태어났으며, 형 문용수의 기독교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조부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문윤국 목사로 3.1 독립운동 평안북도 총책임자로 오산학교를 중심으로 시위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렀다. [1] [2] [3] 그 이후로도 문윤국 목사는 피신을 다니다 강원도 정선에서 생을 마감하였는데, 집안재산을 모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어 가계가 파산하였다. [4]

서울 및 일본에서의 유학생활

1938년에는 서울에서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를 다니며, 조선예수교회 [5] 계열의 명수대예배당 [6] 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다. 그 당시, 창경원이나 흑석동, 상도동 일대에서 전도활동을 하였다. [7]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부설 고등공업학교 전기과에 유학하고, 한인학생회를 통하여 항일운동에도 가담했다. [8]

1940년대 남한에서의 활동

졸업 후 귀국한 그는 1943년 12월 최선길 [9] 과 약혼하였고, 1944년 5월 이호빈 목사의 주례하에 결혼하였다. 1944년 3월에는 서울에 있는 가시마구미 경성지점 전기부에 취직하였고, 1944년 10월에서 1945년 2월 사이에는 경기도경찰부에서 감옥생활을 하며 일본에서의 활동에 대한 취조와 고문이 이어졌다. 1945년 10월에는 금전 문제 때문에 1주일 가량 구금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후, 1946년 4월까지 김백문 목사의 '이스라엘수도원' [10] [11] 에 참여한다. 이곳에서 김백문은 계시에 의하여 모든 신자가 보는 앞에서, 전 세계의 솔로몬왕의 영광이 그에게 임하게 될 것을 축복해 주었다고 한다. [12]

북한에서의 활동

1946년에는 가족들을 남한에 남겨둔 채 홀로 월북하여 평양으로 떠나게 된다. 1946년 6월에는 당시 북한 정부(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신종교에 대한 탄압정책에 따라서, 종교를 사칭해 사기를 쳤다는 명목으로 허호빈이 적발되었다. 문선명 총재는 허호빈과 관련이 있다는 죄목으로 조사를 받았으며, 남한에서 뚜렷한 이유 없이 월북하였다는 이유로 간첩혐의가 덧붙여졌다. 간첩혐의에 대해서는 뚜렷한 혐의가 나타나지 않아서, 사회질서문란죄로 1946년 8월부터 11월까지 수감되었다. 출옥 후 종교활동을 통하여 신도 수가 점차적으로 많아졌으나, 북한의 종교탄압으로 인하여 다시금 간첩 혐의로 1948년 2월부터 5월까지 평양내무서 및 형무소에 수감된다. 5월에는 흥남노무자수용소로 이송되었으며, 이곳에서 1950년 10월까지 강제노역을 당한다. 1950년 한국전쟁 때 흥남에 상륙한 유엔군에 의해 석방되었다. 10일간의 평양 귀환 길에 문정빈, 박정화 등 옥중에서 전도한 네 명의 제자가 따라나섰다. 평양에서 다시 40일간 지승도, 옥세현, 정달옥, 김원필 네 명의 제자를 수습하여 평양을 떠난다. 1950년 12월 4일 평양을 떠나, 27일에 서울에 도착한다. [13] [14].

1950년대 남한에서의 활동

서울에 1주일 간 체류 후, 1951년 부산광역시로 피난하여 자신의 교리인 《 원리원본》을 집필하여 1952년 완성하면서 부산과 대구광역시를 중심으로 새로운 사상을 바탕으로 포교활동을 시작한다. 지승도, 옥세현, 김원필, 이기완, 강현실 등이 초기의 신자였다. [15] 1953년에는 대구로 개척 전도를 하며 세력 기반을 넓혀 나갔다.

1954년 5월 서울로 기반을 옮기며 공식적으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현 신한국가정연합)'를 창설하였다. 주로 대학가를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벌이다, 1955년에 신한국가정연합을 믿는 이대 연대 학생 및 교수들에게 퇴학 및 퇴직 명령이 내려지면서 기반이 약화되었다. 같은 해 7월에는 한국전쟁 당시 병역기피 혐의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다. 10월에 혐의에 대한 무죄판결이 나고, 문선명 총재는 100일간의 수용소 생활을 마친다. 그의 아내 최선길은 수감기간 동안 문선명 총재와 신흥 종교인 신한국가정연합에 대한 비난을 공공연히 하였으며, 교도소에 이혼장을 들고 찾아와서 이혼을 종용하였고, 결국 이혼하였다. 같은 시기, 용산구 청파동으로 본부를 옮기고 정착한다.

1957년 교리서 《 원리해설》( 1966년원리강론( 原理講論)》으로 증보되었음)을 발간하여 본격적인 종교활동을 시작하면서, 1958년에 일본( 최봉춘), 1959년에 미국( 김영운, 김상철)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등 초창기부터 해외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59년 청파동에 통일산업 공장을 세우며, 경제사업을 시작한다.

1960년대 남한에서의 활동

1960년부터 국제합동축복결혼식이라는 대규모 합동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다. 1960년에는 문선명과 한학자의 성혼식과 3쌍의 초대교인들이 참가한 축복결혼식이 열렸다. [16] 1961년에 33쌍이 더 축복결혼에 참여함으로써, 총 36쌍이 탄생하였다. [17] 같은 해, 장녀 문예진과 장남 문효진이 탄생하였다. [18]

1963년에 72쌍의 축복결혼식이 있었으며, 1964년에는 차녀 문혜진이 태어났으나 1주일 만에 사망하였다.[ 출처 필요] [19] 1965년에는 세계 40개국을 순방하며 120개의 성지를 지정하였으며,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회동하였다.[ 출처 필요] 1966년에는 종교간의 화합을 내건 '초교파운동본부'를 설립하였다. [20] 1968년 1월 1일에는 하나님의 날을 선포하였으며[ 출처 필요], 같은 해에, '국제승공연합'을 창설하여 승공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는 그 당시 유행하던 공산주의에 반대한다’거나 ‘공산주의를 박멸한다’는 뜻의 ‘반공’(反共) 또는 ‘멸공(滅共)’보다는, 공산주의를 이기자는 뜻의 ‘승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21] 또한, 이 해 2월 22일에 430가정 축복식이 있었다. [22]

1970년대 미국에서의 활동

1970년 9월에는 세계반공연맹 일본대회를 개최하였다. [23] 1971년에는 기반을 미국으로 옮긴다. [24]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 때에는 닉슨 대통령을 지지한다. [25] 문선명 총재는 미국의 주요 일간지에 전면광고를 내어, 「용서하라! 사랑하라! 단결하라!(Forgive, Love and Unite)」라는 구호하에 닉슨을 옹호하였다. [26] 1974년1975년에는 미국 국회에서 초청하여 "One Nation under God"라는 주제의 강연을 하였다. [27] 1976년에는 워싱턴 마뉴먼트와 뉴욕 양키스 스타디움에서 대규모 집회를 하였다. 워싱턴 마뉴먼트 집회에는 30만 명의 인파가 몰렸으며, 그는 "퇴폐적인 미국 청년들을 위기에서 구해내어 희망의 젊은이로 만들려 미국에 왔다."고 말하였다. 그해 연말 뉴스위크는 그를 1976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였다. [28] 1977년 2월 23일 자신의 생일에는 미국 벨베디아 수련소에서 신한국가정연합이 세상의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망하지 않을 것이며, 반대하는 자가 망하는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주장한다. [29] 1978년에는 뉴욕의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제1회 세계언론인대회를 개최한다. [30] [31]

1980년대 미국에서의 활동

1970년대의 미국에서의 선교로 기독교로부터 많은 개종자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기독교 세력 등의 반발이 거세어졌고, 유대인들까지 적대시하였다. 결국 그는 관습에 따른 선교헌금에 대한 이자소득의 세금을 신고하지 않아, 1984년 7월 20일, 미국의 댄버리 연방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이에 많은 종교인들의 반대운동이 벌어졌다. [32] 이후 문선명 총재는 모범수로 감형을 받아 13개월 만에 출감했다.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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