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위원회 (프랑스 혁명)

1794년 공안위원회, 18세기 프랑스

공안위원회(公安委員會, Comité de salut public, Committee of Public Safety)는 프랑스 혁명기프랑스1793년 4월 7일부터 1795년 11월 4일까지 존재했던 통치기구로 도중 1794년 7월 27일까지 사실상 혁명 정부의 역할을 하였다. 회의장은 튈르리 궁전에 인접한 플로르 사진관(빠뷔욘 ​​드 플로르)이었다.

자유의 확립을 위해서는 폭력이 필요하다며 “자유 전정”을 위해 만들어졌고, 원래는 “조국의 위기”에서 구하기 임시적인 독재기구였지만, 점차 국민 공회의 가장 중요한 기관이 되어 공포 정치를 운영하여 혁명을 추진했다. 초기에는 당통, 뒤이어 로베스피에르가 주도했지만, 테르미도르 9일의 쿠데타 이후에는 약화되었다.

개요

1783년 4월 4일, 프랑스 군사령관이자 전국방장관이었던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국민공회가 자신의 지도력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파리 시내에 군인들을 동원하여 행진하겠다고 위협하는 선동적인 편지의 발표한다. 그 후 뒤무리에는 오스트리아로 망명한다. 이러한 소식은 파리에 경계심을 자극했고, 오스트리아와 연합국에 의해 패배를 당할까봐 불안해했다. 외국 군대와 최근의 방데에서 일어난 반혁명 반란과 내부에서 프랑스를 붕괴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던 외국 대사의 행동에 따라 프랑스인들은 즉각적인 위험에 빠질 것이라는 불안을 야기했다.

혁명군을 이끌던 뒤무리에의 배신은 이러한 불안에 기름을 끼얹는 것이었다. 이러한 위협에 비추어, 지롱드파 지도자인 막시맹 이스나르는 공공의 안전을 위한 9인위원회의 창설을 제안했다. 조르주 당통은 “이러한 위원회야말로 우리가 원한 것이며, 혁명재판소의 무기를 잡을 수 있는 손이다.”라는 말로 이스나르의 노력을 지지해 주었다.

1793년 4월 6일 그 위원회는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당통의 지도 하에 처음에는 당통위원회라고 알려졌다. [1] 당통은 지롱드파의 몰락을 가져온 《5월 31일 반란과 6월 2일 반란》(journées du 31 mai et du 2 juin 1793)을 통해 위원회를 이끌었고, 방데의 전쟁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7월 10일 재구성되었을 때 당통은 배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권력의 중앙집중화를 그 위원회를 통해서 후원하였다. [2]

1793년 7월 27일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가 그 위원회에 선발되었다. 이때에 위원회는 보안위원회라는 강력한 파트너를 통해 사실상 독재라고 할만큼 더 강력하고, 활발한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공안위원회는 장군을 임명하는 권한을 통해 전쟁을 지배하며, 혁명재판소에 판사와 배심원을 임명하며 [3], 군대를 개편하고, 공공질서의 유지, 국가 부서의 감찰 [4] 등의 역할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위원회는 또한 공민공회의 법률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었고, 그리하여 1793년 8월 16일에 통과된 《 국민개병제》와 1793년 9월 17일 통과된 《피의자법》, 1793년 9월 26일 통과된 《최대법》과 같이 가장 엄중한 공포정치를 수행하는 역할을 했다. 위원회의 광범위하고, 중앙집권화된 권력은 프뤼메르 14일 법률(또는 혁명정부법)을 통해 1793년 12월 4일 성문화되었다.

1793년 12월 5일 언론인 카미유 데뮬랭은 《르 비외 코르들리에》(Le Vieux Cordelier)지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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